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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만한 영화

사람을 살아가게 만드는 밥심 - <용의자X> 류승범이 아침마다 사는 도시락은?

by 파크라이터 2014.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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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하는 말중에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밥힘'이라 쓰고 '밥심'이라 읽는 줄 알았는데, 국어사전 찾아보니 맞춤법/표기법도 '밥심'이라고 나오네요. 근데 제 개인적으로 또 하나 드는 생각은 '밥심'이란 말이 '밥을 먹고 나서 생기는 힘'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도 있지만 '밥에 담겨있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크게 써놓고 보니 좋네요. ㅋㅋ

 

며칠전에 제 블로그에 영화 <용의자X : 아무도 풀지 못하는 문제를 푸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포스팅을 했었는데요. 오늘은 2탄쯤 되는 글이라고 여겨주세요. 

 

 

 

 

 

고등학교 수학교사로 재직중인 김석고는 나름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매일 아침 출근길에 도시락전문점에 들러 점심 때 먹을 도시락을 사가는 일입니다. (이 가게 이름이 참 재밌습니다. <좋은 아침>)

 

 

 

 

매일 습관처럼 여기에 들르는 석고는 이 가게의 단골손님입니다. 그래서 그가 카운터 앞에 서기만 해도 점원은 그가 어떤 메뉴를 시킬지 단박에 알아봅니다. 

화선

좋은 아침 하나, 포장이요?

석고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하며) 네.

화선

(주먹밥 하나를 더 챙겨주며)

신메뉴예요. 한번 드셔보세요.

석고

아...

(고맙단 말을 하려는데 안 나오는)

화선

(영수증이 나오자 바로 내밀며)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석고, 우물쭈물 하다가 말없이 얼른 돌아선다.

수학천재답게 내성적인 성격에 여자 앞에선 수줍음도 많이 타는 석구는 도시락 가게 점원인 예쁜 화선에게 호감이 있으면서도 쑥쓰러운 탓에 제대로 다가가지도 못합니다. 자기 혼자서만 짝사랑을 하고 있는 셈이죠. 석구의 마음을 눈치챈 주인집 아줌마가 은근슬쩍 화선에게 찔러봅니다. 


 
정숙

그 맨날 좋은 아침.. 그, 총각 말야...

자기 좋아하는 거 같지 않아?

 한번 사겨보지 그래?

화선

전 윤아 있잖아요. 

정숙

윤아가 뭐? 윤아 이제 중학생이야.

이모가 시집 간다구 뭐랠까...

화선

전 윤아 시집보내기 전엔 남자 안 만나요.

아시잖아요.. 그리구....

전 저런 쑥맥 스타일은 싫어요.

정숙

에이- 또 모르지.

밤엔 야수 스타일일지..?

화선

아우, 됐거든요!


(갑자기 jtbc <마녀사냥>이 떠오르네요. 김석고는 '낮져밤이' 스타일? ㅎㅎ)

쓸데없는 소릴 했군요.
아무튼!
그렇게 썸남썸녀가 된 석구와 화선에게 두 사람을 가깝게 만들어주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화선의 조카 윤아가 아파서 쓰러지는 걸 석고가 들쳐업고 응급실로 뛰어갑니다. 경황없는 화선을 대신해 병원비까지 대신 내주고요. 

 

 

 

 

다음날, 화선은 여느 때처럼 도시락 가게에 들른 석고에게 나름대로 감사의 표시를 합니다. 

 

 

화선

좋은 아침 하나, 포장이시죠?

 

석고, 고개를 끄덕인다. 
화선, 도시락과 함께 흰 봉투를 내민다. 

화선

어제 내주신 병원비요. 

석고

(엉거주춤 서 있자) 

화선

 받으셔야죠.

석고

 아, 네.

석고, 봉투를 받아 안주머니에 넣고,

지갑에서 도시락 값을 내자,


화선

도시락은 이자예요.

 

석고, 뭔가 더 말을 하고 싶으나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지 그저 꾸벅 인사만 하고 나간다. 

그런 석고를 보는 화선의 얼굴에 풋,

 미소가 인다. 


그러나 두 사람이 썸타는 관계가 한 걸음 다가갔나 싶을 때 드디어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화선의 전남편이 찾아와그녀와 윤아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르고, 격투 끝에 결국 화선과 윤아는 전남편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패닉 상태에 빠진 화선과 윤아. 그때 마침 석고가 찾아와 자신이 모든 걸 처리할 테니 믿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석고는 그의 천재적인 두뇌를 이용해 화선이 용의자로 지목되지 않을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화선은 점차 석고의 말대로 모든 상황이 진행되어가자 석고에 대한 신뢰와 연정이 쌓여갑니다. 어떻게든 석고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은데, 경찰의 감시망 때문에 쉽지가 않습니다. 수사진행 상황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서 밤에 공중전화를 이용해 통화하는 것말고는 두 사람은 얘기를 기회가 없습니다.

 

 

 

 

두 사람이 얼굴보고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역시, 아침에 도시락을 살 때 뿐입니다. 

 

화선

좋은 아침, 포장이시죠?

석고

 네.

화선

 (수줍게) 근데요..

오늘은 다른 거 좀 드셔야겠는데요? 


화선이 빙긋 웃으며 도시락을 건넨다.

석고, 뭔가 싶어 화선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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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휴게실에 석고가 앉아있다. 
화선이 손수 집에서 싸서 건넨 도시락. 
안에는 작은 메모지가 들어있다.

고양이 그림이 새겨진 평범한 메모지다. 


화선

 (E) 그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화선의 글씨를 바라보는 석고의 얼굴이 행복감으로 상기된다. 
메모지를 접어서 들고 왔던 책 사이에 끼워 넣는다.
 “The Perfect Number" 라 적힌 책표지.

석고는 화선의 마음이 담긴 그 메모지를 자신이 가장 아끼는 책인 “The Perfect Number" 속에 고이 끼워놓습니다. 물론 그 메모지가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서 석고의 모든 계획을 망쳐버리게 될지는 몰랐겠지만요.

 

 

 

 

전남편을 죽인 화선을 지키기 위해 석고가 꾸민 계획은, 거의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계획엔 '변수'라는 게 있게 마련이고, 완벽했던 계획은 아주 사소한 실수 하나 때문에 무너지게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석고의 계획은 실수로 인해 무너지는 상황까지도 포함된, 정말로 완벽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석고의 동창이자 형사인 민범조차도 석고의 계획을 무너뜨리지는 못합니다. 

 

지난 번 포스팅에서 석고가 그러 엄청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머리 때문이 아니라 가슴이 시킨 일이라고 했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시킨 일, 그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매일 아침 단골로 들리는 도시락 가게의 점원이 예쁘고 친절하다고 해서, 심지어 그 여자가 바로 이웃집에 살고 있어서, 그래서 그 여자와 썸 좀 타보고 싶은 사이라고 해서, 감히, 그녀가 저지른 살인죄까지 자신이 대신 뒤집어써줄 그런 남자는 아마 세상에 없을 겁니다. 석고의 소름끼칠법한 '헌신'의 대상이 된 화선조차도, 석고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에 대해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저 썸 조금 타는 정도였을 뿐인 이웃집 남자가 자신의 살인죄를 대신 뒤집어쓰다니요. 어떤 여자가 그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이 영화의 미스테리적인 긴장감과 반전은 바로 거기에서 발생합니다. 완벽한 알리바이가 어떻게 무너지느냐보다는, 석고가 그런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바로 그 지점 말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석고는 그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얘기해줍니다. 화선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를 통해서 말이죠. 

 

"화선씨가 나타나기 전까지.. 저는 매일 죽음만을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죽는데 무슨 이유가 있을까요... 다만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어졌던 것뿐입니다
수학만이 삶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저의 뇌가, 저의 머리가 점점 퇴보하고 있다는 사실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과거의 어느 날, 석고는 풀리지 않는 수학의 난제로 인해 지칠대로 지쳐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방에 로프를 매달고 의자에 올라선 석고.
의자 위에 올라선 석고. 
한 발을 허공에 내딛고는 잠시 후 한 발을 떼는 순간

휙- 로프가 당겨져 올라간다. 

점점 조여지는 석고의 목. 
석고는 최대한 버둥거림을 자제하며 눈을 감는다. 
숨이 멎을 것 같은 한참의 순간..

바로 그 때 울리는 초인종 소리. 

잠시 후 울컥 석고의 몸이 뒤채더니

석고의 눈동자가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본다. 


석고, 현관문을 열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환하게 웃고 있는 화선과 윤아의 얼굴.

석고는 벌겋게 충혈된 얼굴로 그녀들을 본다. 

화선

저희, 옆집에 새로 이사 왔는데요..

윤아

이거... 


보면 접시에 주먹밥이 정갈하게 담겨 랩으로 씌워져 있다.

윤아

우리 이모가 만든 건데요,

맛은 책임질 수 없어요..


화선, 윤아를 쿡 찌른다.

 

석고, 주저하며 접시를 받는다. 
닫힌 현관문 앞에서 석고,

가만히 접시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문 너머로 윤아의 목소리가 해맑게 들려온다. 

석고 (E)

 그 순간 알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학의 아름다움과 본질적으로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요. 


삶을 포기하려던 순간, 옆집에 새로 이사온 화선과 윤아. 
그녀들이 주고 간 주먹밥.
아무 것도 아닌 그 주먹밥 때문에, (사실은 화선과 윤아의 환한 미소 때문에), 석고는 삶을 좀 더 이어가보기로 마음을 바꿉니다. 
며칠 후 집 앞에서 화선을 만나게 된 석고가 간신히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 

석고

지난번에...

맛있게 먹었습니다.

화선

아, 다행이네요..

원하시면 매일 드실 수도 있는데...

 

 

그렇게 화선은 자신이 일하는 도시락전문점 <좋은 아침>을 얘기하고, 그후로 석고는 매일 아침 그녀가 일하는 가게 도시락을 사러 갔던 겁니니다. 그럴 수밖에없었겠지요. 

죽을 결심까지 했던 석고에게, 수학과 같은 아름다움을 일깨워준 그녀들. 
석고의 운명을 죽음에서 삶으로 바꾸어준 그녀들. 
석고에게 진정 살아있음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 그녀들

그녀들을 어떻게 날마다 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석고 (E)

화선씨... 그리고 윤아...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석고가 어떻게든 그녀들을 지켜주고 싶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들이 행복하게 웃어야 그 미소를 보며 석고가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죠.

석고의 그 마음을 단순히 사랑이라 표현하기엔 뭔가 안 맞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원작에서도 <용의자X의 헌신>이라고 했겠지요. 용의자보다는 '헌신'이란 단어가 더 와닿는 그 제목처럼, 석고의 선택은,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한 그의 마음은, 사랑보다는 '헌신'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석고의 그 엄청난 헌신의 처음은, 바로 사소한 주먹밥 한 그릇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석고가 죽기로 결심한 날, 옆집에 이사온 화선과 윤아가 주고 간 주먹밥 한 그릇에서 말이죠.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그 주먹밥 한 그릇이 결국 석고의 목숨을 살린 것입니다. 
그 후 석고는 화선이 만들어주는 도시락의  '밥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밥을 먹고 나서 생기는 힘 때문이 아니라, 그 밥을 먹으면서, 그녀들을 생각하면, 차가왔던 그의 마음에도 따듯한 온기가 돌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것이 이 영화를 보고나서  '사람은 밥심으로 살아간다'는 명제를 증명해보라면, '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지 않을까요?

 

밥이라는 건 정말 위대합니다.

한 그릇의 밥은,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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